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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주일설교 2022

츤데레 하나님(창세기 16장, 21장)

츤데레 하나님(창세기 16장, 21장)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 
성경을 읽어 나가다보면 교회 안에서 자주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불쑥 불쑥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하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묵상하기 위해서는 앞뒤에 배치된 두 이야기를 같이 셋트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 앞에는 하갈의 임신과 가출이야기가 놓이고 오늘 이야기의 뒤에는 그 유명한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아브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갈의 가출이야기는 오늘 이야기의 예고 같은 역활을 한다면 모리아산 이야기는 쌍둥이 서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는 구조적으로 아주 유사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다 평소의 하나님이라면 하지 않을 독특한 행동(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이 진행되는 과정 가운데 아브람 - 사래와 하갈 - 이삭과 이스마엘의 등장인물이 나오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구조나 내용적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건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후대에 이 사건을 듣는 이들에게 모리아 사건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되지만 이스마엘 사건은 잊혀진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는 중요하게 여겨지고 다른 하나는 잊혀진 이야기가 되었을까요? 아니 오늘 우리는 역으로 질문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왜 그렇게 잊혀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다시 그 잊혀진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며 들어야 하는 소리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의 하나님의 마음 탐색 세번째 시간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그들의 문제에 개입할 수 없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정작 기다리지 못하고 여러가지 다른 길을 걷는 것은 아브람과 사라입니다. 오늘 사건 역시 거기서 출발합니다. 사라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의 여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드리려는 거룩한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과 헌신의 결과로 얻어진 임신 때문에 자기의 여종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을 가출을 하게됩니다. 하갈의 가출 사건(창세기 16장)은 하나님의 사자의 권고와 약속으로 하갈이 다시 집으로 돌아옴으로 맺어집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따르면 잠시 잠잠해져 있던 문제는 약속의 성취로 이삭이 태어나자 다시 불씨를 일으키고 폭발합니다. 이번에는 하갈이 가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괴로워 하지만 그들을 광야의 죽음의 자리로 내모는 일에 협조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갈의 가출에 대해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쫒아내는 일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 속에서 하나님은 허락 방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 스럽지 않으신 모습이지요. 자비, 정의롭지 못하시고 상당히 답답한 하나님의 모습이 결국 불쌍한 두 모자를 사지로 몰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잠시 멈춰서서 과연 하나님의 이런 태도가 적절한가?를 물어야 하고 도대체 왜 이런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하나님은 하고 계신걸까?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도 하갈과 이스마엘이 당한 일처럼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더욱 힘이 드는 것은 그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기 보다는 침묵 혹은 방조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 때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인지는 모르지만 문득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종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엄마나 아빠에게 판단을 해달라고 달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 이야기를 듣다보면 각자의 이야기가 다 일리가 있고 반대로는 모두다 문제가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뜻 판결을 내리지 않고 그냥 얼버무리거나 침묵을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 태도가 두 아이 모두에게 실망스럽게 되지요. 하지만 두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또다른 시야를 가진 부모는 개입하지 않는 선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 사건 속 하나님의 행동 역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라는 사라대로 아브람은 아브람대로 하갈은 하갈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옳음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정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기대에 부응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운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결국 내 안에 내 하나님을 만들어 그걸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부르게 되는데까지 나가게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을 잘못읽으면 하갈과 이스마엘은 당연히 쫓겨날 만한 존재이고 그렇게 버림받고 죽어도 큰 문제가 없어!! 라고 그게 좋고 옳은 신앙이라고 생각해 버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피할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옳음과 주장을 펴다가 문제가 엉켜버렸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의 옳음을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에 대해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 밖에 없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들이 더이상 주장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게 되는 순간에 등장하셔서 당신의 마음을 들어내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은 울기는 하갈이 울었는데 하나님은 두번이나 이스마엘의 울음을 들으셨다고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하갈의 울음과 땡깡과는 달리 이스마엘은 울수조차 없어 그저 망연자실해 하는 울음을 웁니다. 하나님은 그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것. 자기 주장조차 할 수 없는 약자 소수자를 옹호하시고 지키시고 그 소리를 소리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십니다. 들어보니 옳아서가 아니라 들어줄만한 무게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에 옳지 않아도 소중하기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시시비비와 정의를 가리는 것을 넘어서는 생명존중 진정한 살림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가운데는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것 보다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을 씹어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을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때그때 꺼내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서로에게는 사랑을!” 

 

https://youtu.be/FNdFwdfaQ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