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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주일 설교 2021

2021 디딤돌 교회 1월 3주 설교(누가복음2)

 달리면서 균형을 맞춘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로 오셨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가 행하신 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제자를 부르시는 일과 병을 고치는 일을 할 때 그가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두 번째 이야기를 같이 생각하면서 아래의 시를 먼저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고 같이 시작을 해보려고 합니다. 시를 들으시면서 여러분들의 마음과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고 오늘 예수님의 행적을 같이 따라가 보면 좋겠습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오늘 우리가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하는 5장에는 제자를 부르시는 두 번의 다른 장면과 병을 고치시는 두 번의 장면 그리고 그에 따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짧은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먼저 간단히 에피소드들을 살펴 볼까요? 

 

두 다른 부르심

베드로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당히 꼼꼼하고 계획적입니다. 하지만 레위를 부르시는 모습은 즉흥적이고 상당히 압도적입니다. 베드로 주변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특별한 권위나 능력을 경험했지만 레위 주변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에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반응과 레위의 반응 역시 상당히 대조됩니다. 마지막으로 최종적인 예수님의 말씀 역시 차이가 선명합니다. 예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각각은 처한 상황, 직업, 성품...의 차이에 따라 다른 과정, 반응, 부름의 길을 밟게 됩니다. 하지만 이 둘은 이런 대조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분명한 일치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정과 모양과 결과가 달라보여도 주도권과 그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 원하시는 방향으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두 다른 고치심

나병환자를 고치심과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에도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자기가 찾아 올 수 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 깨끗케 하신 사건과 죄를 사하신 사건. 결과를 숨기도록 하신 것과 결과를 오히려 논쟁의 거리로 삼으신 일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명확한 차이에도 둘 사이의 공통점 역시 존재합니다.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은 둘 다 각자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끗케 함' ‘죄 용서' 의 문제로 다르게 묘사된 둘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병이 보여주는 중요한 문제가 ‘소외' 혹은 ‘단절'이라는 것입니다. 예 두번의 고치심을 통해 성경은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 이 땅 가운데서 이루려고 하시는 것의 내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죄로 ‘소외’ 되고 ‘단절'된 이들을 다시 회복시킨다 입니다.   

 

병든 자에게 필요한 의사, 새 술은 새 부대에

그리고 이런 주도권과 방향은 그 분이 직접하신 언급에 의해서 정리가 됩니다. 이 두번의 언급은 주변 사람들의 항의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이 항상 누구에게나 수용되어지는 불편부당한 진리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흔들리는 것이기에 기울어진 편들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편들기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들의 심한 반발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전격적인 부르심 앞에 신나는 마음으로 잔치를 베푸는 레위를 보며 그들은 맘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윤리적이거나 경건한 모습을 취하지 않는 예수의 제자들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 편하지 않음이 결국 무언가 시비거리를 찾아 따져 묻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두 말을 있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레위가 잔치를 베푼 일이나 제자들이 경건한 모양새를 갖추지 않는 일이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삶과는 직접적인 어떤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레위 그리고 제자들은 사실 다른 삶의 자리를 살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나 자기 삶과 관계없는 일에 말을 보태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그렇게 시비를 거는 이유는 ‘불편함'과 ‘위기 의식' 등이 계기가 되며 꼭 그런 이들은 ‘상식'이나 ‘원칙'을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레위가 베푼 잔치에 대해 그들이 시비를 건 내용은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였습니다. 왜 이 말이 시비에 대한 절묘한 답이 될까요?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말이 눈과 마음에 닿으시나요? 예수님의 대답의 절묘함은 그들이 고발하는 사실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판자체를 뒤짚는 전복적 도발로 전세를 역전시킴에 있습니다. 

 

두번째 시비는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시비입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금식과 기도에 대조되는 먹고 마심이 그들의 타겟입니다. 이 일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혼인집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그리고 이어서 오히려 역공을 취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조금 길어 보이는 이야기는 옷 이야기, 포도주 부대 이야기, 포도주 이야기입니다. 옷 이야기와 포도주 부대 이야기는 이해하는데 큰 무리가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거기까지만 소개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새옷, 새포도주이시고 헌 옷을 넘어서야 하며 그냥 엉성하게 섞으면 안된다! 문제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묵은 포도주가 좋다는 걸까요? 예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의 가장 난점은 앞에서부터 이어오던 예수님 이야기와 조화가 흐트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와 비교하여 새포도주의 새 옷의 장점을 나열했는데 이제와서 그걸 뒤짚으면 이걸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번역한다면 어떨까요? “묵은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새 것을 시도해 보려하지 않고 묵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말한다" 예 지금 예수님은 자기를 정말 싫어하고 비아냥 대는 사람들과 말로 일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쌓아왔던 싸움의 마지막 일격을 가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라고 한방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회심의 일격을 던지신 것이 마지막 문장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러니를(비꼬아 상대방을 공격하는)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상식이라고, 진리라고, 기초라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너희들은 거기 머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야! 라고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전거는 달리면서 균형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말은 그가 허공(이상적인 진공상태라는 의미로서)에 계시는 것이 아닌 실제적인 일상의 사람 중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자전거를 타보셨나요? 자전거는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균형을 잃고 기울어질 때 넘어집니다.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자전거가 균형을 잡는 일은 역설적으로 좌우로 기울어지며 발생합니다. 좌우로 기울어지고 흔들리지만 계속 앞으로 나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때 자전거는 계속되는 좌우로의 기울어짐 속에서 넘어지지 않을만큼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같이 나누었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생각해 보십시오. 꽃은 흔들리며, 젖어가며 핍니다. 머물러 있고 안전한 곳을 넘어서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굳게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 위에서 계속 흔들리며 가는 일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삶과 도전이 보여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과 영광이 아니라 바로 흔들리며 젖으며 달려나가는 자전거,  피는 꽃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절대진리, 절대 권력을 버리시고 이런 불안함, 흔들림, 기울어짐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적이 있었고 그 적들에 둘러싸여 흔들리고, 젖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심장 그리고 몸 깊숙한 곳에는 이 사랑에 기초한 깊은 믿음이 있었고 이 믿음이 그에게서 두려움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꽃은 흔들리며 젖으며 핍니다. 자전거는 달리면서 균형을 맞춥니다. 믿으십시오. 두려워마십시오. 계속 달리십시오.

 

www.youtube.com/watch?v=HJFCV0X_lNQ&t=6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