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있는자 (출애굽기 3장 14절)
디딤돌은 2022년 사순절 기간에 매일 한구절씩 암송으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첫번 주제는 시편의 시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로 고백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 나의 산성, 나의 반석, 구원자 다음 주에는 나의 왕, 목자, 심판자, 창조자…등을 암송하며 묵상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과 균형을 맞추면서 첫번째 주 주일 설교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는지를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구약의 곳곳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혹은 직접 믿음의 사람을 찾아와서 자기를 소개합니다. 그 중에 오늘은 가장 분명하고 극적인 장면 하나를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점점 더 커지는 이스라엘을 두려워 하여 산아제한을 시키는 즈음 태어난 모세는 우여곡절을 거쳐 왕궁으로 광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행동을 하다가 심각한 좌절을 경험하고 도망하여 그 모든 것을 잊고 어언 40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더욱 악화가 되었고 결국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서 그를 다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로 보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하는 장면의 간략한 배경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내고 그에게 자기의 마음을 전달하는데 이를 회피하려는 마음 반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근거가 필요해서 반 모세는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신지를 묻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오늘 우리가 읽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누군가에게 의존하실 필요도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하지도 않으신 존재. 왜 지금 이때에 이 수상한 자기 소개를 못박고 계시는가? 구원이 필요한 시점 그것을 실현 가능한 존재가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 구원자, 전능자, 전지하신 분…으로 고백한다는 말이 갖는 의미는 우리의 삶에 우리로서는 넘어설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뚫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 광야 한켠의 불타는 가시나무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시는 하나님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저히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암담한 애굽의 노예살이의 시간 무언가 자기 나름의 혁명을 시도했으나 도망자 신세가 되어 타국으로 망명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살아가게 되는 잊혀진 정치 지도자인 모세에게 그들이 상상하고 계획하고 이룰 수 있는 현실 그 너머의 존재 혹은 힘이 없다면 그저 그렇게 대강 기억을 잊고 살아야 하는 모세에게 다시 꿈과 용기를 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려면 무언가 우리와는 다른, 큰, 강한 존재가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지난 수목금 우리가 같이 묵상했던 시편의 하나님 고백을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방패,산성,반석,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마음에 담고 필요할 때에 꺼내서 씹으면서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꿈과 용기를 갖자 했습니다. 예 신앙은 이런 것이고 우리의 위기와 문제와 한계에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힘이 있는 것은 그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힘이 세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모두의 삶에 이런 하나님 때문에 온갖 삶의 풍파에도 넉넉히 견디며 살아가게 되길 축복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을 조금 다른 측면으로 보면 하나님은 홀로 충분히 힘도 자격도 행복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지금 모세를 부르셔서 말을 걸지 않으셔도 사람을 자기 형상을 창조하지 않으셨어도 자신이 얼마나 힘이 세고 전능하신 왕이심을 증명해 내지 않으셔도 우리가 그 분을 인정하고 따르지 않아도 그 분은 이미 홀로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지금 괜히 잘 살고 있는 모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자기들 잘못으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그냥 내버려 두셔도 되는데 그걸 견디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장면의 이상한 지점이 여기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폼나게 자기 소개를 하시는 하나님의 소개가 거기서 멈췄다면 멋있었을텐데 하나님은 모세가 물어 본 것 이상으로 주저리 주저리 자기 이야기를 늘어 놓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러시는 걸까?에 대해서 조금은 더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신약으로 넘어가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하는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신 장면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주님은 그 처음을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가? 라는 답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그 분은 오롯이 하늘에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마치 이것은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고 말씀하시는 부분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은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전능하고 차원이 다르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이기에 기도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하이라이트로 잠시 본 드라마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나의 신념을 포기했다" 지난 주 말씀드렸던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 속 대사입니다. 고아원에서 입양되어 자란 미조는 자기 자존심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생명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자기 친구의 편을 들기 위해 그 자존심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습니다.
저는 오늘 장면속 그리고 주기도문 속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되시려고 전능을 내려 놓으시는 분.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귐을 가지려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신 분. 분명히 불안하고 의심이 가지만 믿어 주기로 하신 분. 그래서 망친 많은 일들을 그냥 버려 두지 못하고 먼저 수습에 나서시는 분. 끝없는 실패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기다림으로 다시 찾아오시는 분 그런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이 힘이세서 전능해서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 그런 분이라서 그 분이 그렇게 내 편이라서 우리는 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이런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좀 더 실감나게 만나시고 마음에 담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종종 꺼내서 위로,격려,인정,용기,도전,꿈을 얻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마지막 한가지만 더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셨지만 이스라엘을 위해 만나셨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생생하게 그 하나님을 아빠 하나님을 만나셔서 힘을 얻으셨다면 눈을 들어 그 아빠 하나님이 안타까와 하시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사순절 기간 우리의 묵상과 기도에 우쿠라이나가 강원도 산불 피해자들이 정치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 한국의 상황이 우리의 기도로 말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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