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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주일 설교 2021

기다림 3.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요한 계시록 22장 20-21)

 

기다림 3.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요한 계시록 22장 20-21)



그때와 여기

우리는 대림절의 시간을 보내면서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전혀 기다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찬고 추구함으로 기다렸고 또 다른 이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날을 매일매일에 충실함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지냈습니다. 다른 듯 같은 이 둘의 가장 근본적인 공통점은 이들이 기다린 것은 처음 오신 아기 에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훌쩍 넘어 다시 오실 주님 예수를 기다렸던 초대 교회 사람들의 이야기를 요한이 본 환상을 통해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라나타'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인사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도 현실에서도 아주 절박하게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렸기에 그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만날때마다 마라나타(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십옵소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이 본 환상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 고백이 마침 송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오늘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눈을 감으시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서로에게 ‘마라나타'로 인사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인사를 나눌때 그들이 가졌던 감정과 기대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왜 이렇게 인사를 했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2000년이라는 시간동안 우리 주님의 재림은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마라나타'는 그리 간절하지도 입에 붙지도 않는 인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상상합니다. “그들은 핍박과 배교의 위험 속에서 당하는 현실의 곤란함을 피하기 위해 빨리 주님이 오시기를 바랬고 그 바램이 인사에까지 반영되었다"  “그들은 이런 인사 속에서 저 천국을 소망하며 여기의 고통을 잠시 잊거나 견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도 저 천국의 소망을 붙잡고 지금 여기를 잘 견디고 승리하자. 이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그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한 번 물어 봄으로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마라나타'의 기다림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왜 축복인지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펜데믹과 장례식

펜데믹이 모든 이의 예상을 훌쩍 넘어 2년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 가장 처음 놀란 것은 야외에서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학교가 규모는 줄였지만 연말 컨서트를 진행합니다. 오랫만에 방문한 Hmart에는 푸드 코트에 다시 의자와 테이블이 깔렸습니다. 주말이라 손님은 엄청 많구요. 여전히 오미크론이니 더 오래갈 것이니 하는 위협의 소리가 있지만 한국에서 온 제 눈에는 80%는 복귀 된 듯 보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집니다. 일상의 힘이라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듯이 저는 한국에서 아버님 장례식을 치르고 왔습니다. 2박 3일의 3일장 가운데 경험하는 가장 신기한 일중 하나는 ‘슬픔도 밀려오는 일상과 수다와 일들 앞에 맥을 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위기와 슬픔에도 우리는 먹어여하고 만나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상 앞에 조금씩 무뎌져갈 수 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주님이 금방이라도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것만을 바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과 소망은 일상 앞에서 분명히 무뎌졌을 것입니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일상은 망각을 가져오고 그렇게 그렇게 무뎌져 갑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시간이 약이다' ‘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  예 맞습니다. 그들도 우리도 일상을 이길 도리는 없습니다. 결국 문제는 얼머나 절박했는가? 가 아니라 무뎌져 감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며 우리에게 주어질 소망의 날을 우리가 당기거나 오게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은 계속 말씀드리지만 하늘로 부터 오는 ‘은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단호한 결정과 선언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일때 마다 만날때 마다 ‘마라나타'로 인사했지만 그들은 이 인사를 통해 여기를 떠나 저기를 가기를 기대하거나 여기의 모든 어려움이 없어질 그 날을 꿈꾼 이들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매일매일의 삶에서 여기를 거기로 만드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들이 나누는 인사 ‘마라나타'에는 그것을 가능케하는 결단과 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감당하고 살아야 할 일상은 그들에게 그분이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포기할 것을 강제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라타나'를 외치며 그것에 저항하기를 선택하고 서로를 만날때 마다 우리 그렇게 살자로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오면 펜데믹을 지나면서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많은 일들에 대해 돌아보라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하고, 멈춰서서 돌아 봐야 하고,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삶을 거슬러 사는 일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임 또한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장례식을 지내면서  참 많은 것을 보았고 느꼈습니다. 과연 ‘죽음은 나쁜 것인가?’ ‘오래 사는게 꼭 좋은 건가?’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돈의 논리에 노예가 되어 있는가?’ …  그렇게 느꼈던 도전과 교훈을 살아내는 일은 또다른 숙제요 도전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깊게 돈과 세상의 풍조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것을 다시 묻고 정신을 차리고 사는 일은 정말 어렵고 ‘믿음과 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믿음과 은혜

오늘 요한은 그의 긴 환상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다시 ‘마라나타'의 인사를 꺼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꼭 속히 온다" 그들이 답합니다.”예 주님 우리가 믿고 소원합니다. 꼭 오십시오. 얼른 오십시오" 이제 요한이 모든 것을 맺습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 마라나타를 고백하고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내가 돈을 벌고 은퇴 이후를 생각하는 일에, 부부간에 서로 사랑을 나누는 일에, 먹고 자고 놀고 쉬고 더불어 사는 모든 일에 여기와는 다른 나라가 있음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모두가 옳다 여기고 당연하다 여기는 일이 아닐 수 있음을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 거기를 날아내기를 애쓰자고 다시 다집하는 일입니다. 이번 한 주 마라나타를 고백하며 ‘여기에서 저기’를 같이 살아내는 디딤돌 식구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https://youtu.be/Wvx1qT8AtfQ